#29 가을을 지나 겨울로

소리도 없이 가을이 찾아왔었고 이제는 다음 계절로 들어가는 문턱에 있다.
으레 10월 말이면 곳곳에서 가을이 왔다는 흔적들을 느낄 수 있지만, 내가 있는 이 곳, 밴쿠버에서는 정말 소리도 없이 조용히 가을이 찾아온 듯 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반바지와 반팔로 돌아다닌 것 같았는데, 이제는 아침 저녁으로는 플리스 재킷을 걸치고 다녀야 할 만큼 기온은 진정한 가을로 접어든 것 같다. 거리의 곳곳에서 붉게 그리고 노랑 빛으로 물든 나무의 잎사귀들은 어느덧 나무에서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위 말하는 ‘단풍구경’에는 관심이 없이 살아왔다. 설사 누군가를 따라 단풍을 본다 한들 마음에 감흥이 없다. 게다가 ‘꽃 구경’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어 꽃 축제 같은 곳에는 가지도 않을뿐더러 가더라도 뭔가 특별한 감정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나에게 감정이 메말라 있는건 아니냐고 물어볼지도 모르지만, 솔직하게 난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난 나만의 특별한 감동과 감정을 느끼는 영역이 따로 있으니까.
오늘은 11월의 첫 날이다. 내가 여기 온지도 이제 3개월이 지나고 있다. 느껴지기로는 한 1년쯤은 이 곳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불과 3개월 전까지 한국에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가끔은 아이들에게 묻는다. 캐나다에 온지 얼마쯤 된 것 같느냐고. 두 아이는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정확히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1년은 살았던 것 같다고.
밴쿠버에서 가장 날씨가 좋다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있으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어느새 두터워지고 있고, 어떤 이들은 겨울 모자까지 쓰고 다니기도 한다. 처음 와보는 한 동네 카페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본다. 거리의 곳곳에 빨강 노랑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고, 그 낙엽들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손님들의 테이블 위에는 이제 시원한 음료의 glass보다는 따뜻한 커피잔들이 놓여져 있고, 그 커피잔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2025년 1월 달력을 펼칠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불과 두 장의 달력만을 남겨두고 있다.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는 이미 겨울이 찾아왔다는 것을 느낄수가 있고, 거리의 풍경에서는 따뜻한 초록빛깔보다는 차가운 회색빛깔이 더 지배적이다. 아직까지는 가을 같은 옷차림을 유지하고 있지만, 아마도 몇 주 후면 내 옷차림도 제법 겨울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길정도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겨울, 개인적으로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 계절이지만 새로운 나라에서 맞이하는 첫 겨울은 내가 그 동안 느껴왔던 겨울의 그것과는 다를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어떤 감정과 정서, 그리고 향을 가질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느껴왔고 경험해 왔던 바운더리를 벗어나 전혀 새로운 2025년의 겨울을 느낄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