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돌아보니 1년, 그리고 그 후

계절이 4번이나 바뀌어 처음 밴쿠버 땅을 밟았을때의 그 계절로 돌아왔다.
작년 7월 24일, 우리 가족은 낯설지만 친근한 밴쿠버에서 첫 날을 맞이했다. 나는 오래전 캐나다에 세 차례 여행을 왔던 적이있었고, 아내 역시 단기간 캐나다에 거주했으며 또 여행을 왔던적이 있던터라 이 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는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니었다. 여행이 아닌 처음으로 낯선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또 다른 얘기였다. 이 아이들에게 있어 캐나다라는 나라는 어떤 이미지로 다가왔을지 그리고 이 나라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오늘은 우리 가족이 캐나다에 와서 지낸지 1년째 되는 날이다. 오래전에 언급을 한번 했던것 같은데, 처음 이 나라에 와서 지내기 시작했을때 시간은 참 천천히 갔다. 하루 24시간이 길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고작 한 두달이 지났을 뿐인데, 마치 이 나라에서 1년은 족히 살고 있던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 이후로도 시간은 참 천천히도 갔다. 여름에서 가을로, 그리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때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나라에서 정착하기 위해 처리해야 할 일도, 알아야 할 일도, 그리고 해결해야 할 일도 많았지만 하루하루가 비교적 즐거웠다. 사실 즐거웠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익숙했던 한국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롭게 시작하는것 자체가 일상의 신선한 변화였기에 '즐거웠다'라는 단어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4월, 비만 하루종일 내리고 오후 4시만 되면 어둑해져 야외 활동을 하기도 어려운 긴 5개월의 겨울이 지나 도시의 풍경이 제법 푸릇푸릇해지던 봄이 찾아왔다. 한국에 비하면 아직 완연한 봄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봄같은 티가 나던 그 시간마저 지나 이제는 한 낮의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여름, 그것도 한여름이 찾아왔다. 물론, 밴쿠버는 아침, 저녁으로는 꽤나 선선한 바람이 불고 기온마저 20도 아래도 떨어지기 때문에 한국에서처럼 습하고 더운 날씨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아침 일찍 외출을 할때는 긴팔을 입고 나가거나 얇은 외투를 걸치는 경우도 다반사다. 7월의 날씨에 맞지 않게 패딩 자켓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종종 심심치않게 마주친다. 몸에 열이 많은 나로서는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 도시에는 워낙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보니 어떤 옷차림을 하든 그러려니한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시간은 처음에는 느리게 가다 어느 순간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하루가 아닌 한주 단위로 흘러가기 시작했던듯 하다. 우리의 뇌에는 기록장치같은 영역이 있어서 익숙한 삶이 지속될때는 이 기록장치가 작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무언가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새로운 것을 볼때는 이 장치가 기록을 시작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삶에 익숙한 루틴이 지속될 때는 시간이 날아가듯 지나가지만, 반대의 경우 시간은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바로 그 이유다. 처음 이 곳에 왔을때는 모든 환경이 새롭고, 또한 새롭게 헤쳐나가야 할 것들이 많았기에 처음 3,4개월간은 마치 이 나라에서 산지 적어도 1년 이상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익숙한 일상이 지속되기 시작한 뒤로는 시간은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덧 밴쿠버에 온지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사실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 중 한 곳인 밴쿠버에서 지난 1년을 살아온것이 기적이다. 남들이 들으면 황당하다 싶을 만큼 적은 돈을 들고 와 4인 가족이 1년을 살았으니 그 자체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는 한국의 물가 역시 낮지 않은데, 이 도시의 물가는 한국은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높다. 월세는 말도 안되게 비싸며, 외식 물가는 한국식당에서 찌개 4개를 시켜도 10만원이 나온다. 전기세, 물세, 인터넷도 한국에 비해 높은 요금이 책정되어 있다.게다가 각종 보험료 역시 한국에 비해 지나치게 높다. 한국에 있을당시 자동차 보험료로 1년에 약 40만원을 냈지만 여기서는 한달 자동차 보험료만 15만원을 낸다. 그나마 나는 적게 내는 편에 속한다. 지인 중 한명은 한 달 자동차 보험료로 28만원씩을 내고있다. 그러니 우리 가족은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결코 적지 않다. 물론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이 나라에 온것은 아니지만 이 곳 물가는 내가 생각했던것 보다 훨씬 더 높다.
1년이 다 되어가는 요즘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아이들 교육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이 나라에 왔고 아이들은 이 나라의 교육과 환경에 너무나 잘 적응하며 지내고 있는데, 과연 이 곳에서의 삶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아이들에게는 영어를 빨리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이 펼쳐져 있는데, 경제적인 뒷받침 아래 이 아이들을 좀 더 오래 이곳에 머물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건 부모로서 늘 딜레마다. 이 나라에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들의 대다수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온다. 그것이 이민이든 아이들이 학교를 마칠때까지의 기간이든 부모들은 아이들이 이 나라에서 교육을 받기를 원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적어도 이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면 다른건 몰라도 영어만큼은 한국에서 배우는것 보다는 훨씬 빠르고 효과적으로 배울수 있을거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두 학기를 지내고 지금은 첫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다. 한국의 여름방학과는 달리 이 곳의 여름방학은 거의 3개월이다. 학교에 다닐때는 친구들을 만나는 재미에 학교 생활이 재미있다고 하고 여름방학에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즐거움에 방학이 좋다고 한다. 8시가 훨씬 넘어서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아이들은 그날 그날의 일정에 따라 동네 도서관에 가 책을 읽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기도 하며, 가끔은 교회 행사나 캠프에 참여하기도 한다.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는 나와 자전거를 타거나 쇼핑몰에 가서 쇼핑을 하고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한다. 지금 한국에 있었다면 이 아이들은 무얼 하면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을까 상상을 해본다. 방학특강을 하는 여러 학원을 다니거나 숙제에 파묻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싶다. 그런면에서 아이들이 이 환경을 더 좋아라하는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물론 한국에 계신 조부모님들과 친구들, 그리고 한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다이소, 편의점, 스트릿 푸드를 그리워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지금 내 앞에 펼쳐있는 환경은 결국 내가 선택한 결정에 의한 결과다. 캐나다로 오기로 결정했기에 지금 나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것이고, 과거에는 원하든 원하지않든 대한민국에서 살기로 결정했기에 그 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곳에서 보낸 1년은 길었다면 길었고 짧았다면 짧았다. 지난 1년간 평범한 일상속에서도 즐거움이 있었고, 가끔은 그 평범한 일상을 깨는 예상치 못한 크고 작은 사건들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캐나다만의 여유로움도 있었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너무 즐거운 시간들도 많았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여러 사람들도 만났고, 또한 그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의미로 다가왔던건 멀리 떨어져 계신 부모님에 대한 보고싶음이 커진 시간과 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소소하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지난 1년, 상식적으로 도저히 경제적으로는 1년도 버티기가 어려운 시간이었음에도 생각지도 못한 도움으로 이 곳까지 왔다. 앞으로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펼쳐질 또 다른 1년은 어떤 시간으로 다가올까. 이제 그 1년이 시작된다.